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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전남편 남자친구 본문
김연자 전남편 남자친구
김연자 전남편 김호식 나이 직업 1400억원의 수입현재 남자친구 홍상기 대표
이혼 당시 무일푼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 위자료와 재산분할도 하지 못해
원조 한류스타이자 엔카계의 여왕 김연자가 ‘아모르파티’의 성공 이후 현재까지도 그녀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김연자의 14살에 데뷔 한 이후부터 일본에서 거둔 성공과 무일푼으로 한국에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 등 그녀의 삶에 대한 포스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연자는 1959년 1월 25일생으로 61세이며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출생으로 154cm, 47kg 학력은 수피아여자중학교,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졸업했습니다.
김연자는 1974년 동양방송에서 열린 '전국가요 신인스타쇼'에서 우승했으며 같은 해인 1974년 '말해줘요'라는 곡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 데뷔 ◁
김연자는 ‘너는 가수가 돼야 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서울에 올라와 밤*무.대를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연자의 아버지는 이발소를 하셨다고 하는데요. 딸이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아셔서 맨날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김연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나이 14살, 중학교 3학년 때 중퇴를 시키고 가수하라고 서울로 보내버렸다고 하는데요. 당시 15살인 그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18살이라고 속이고 데뷔를 했다고 합니다.
김연자는 가수로 활동하면서 밤업소에도 다녔다고 하는데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집안에 가장이 되었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두 동생 대학생활까지 뒷바라지했다고 하는군요.
밤*업.소에서 일할 당시 무대 의상은 단 3벌이었다고 하며, 한 벌은 시장에서 사고. 두 벌은 밤*업.소 언니들이 줬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3벌의 의상을 가지고 1년 내내 돌려 입었어야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일본 진출 / 한국에서 성공 ◁
김연자는 19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당시 말할 상대가 없었던 그녀는 한국에 있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너무 많이 걸어 ‘국제 전화 요금만 30만 엔이 나와 소속사에 혼이 났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1977년에는 '여자의 일생'으로 일본에서 첫 데뷔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큰 히트곡 없이 한일 양국에서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요. 김연자는 “그 시절은 전쟁 같았다”라고 고백하며, 그러나 그 힘든 3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면 일본에서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후 1980년 '노래의 꽃다발'이 한국의 음반 시장 최대 360만 장의 판매를 기록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일본 진출 성공 ◁
1984년 NHK홀 콘서트 라이브가 레코드가 한.일 동시 발매를 기점으로 동년도 '수은등'으로 한국에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1986년 명작곡가인 길옥윤(패티김의 남편)이 작곡한 서울 올림픽 찬가 '아침의 나라에서'로 일본에서 다시 데뷔하게 되며 개사를 하게 된 이 곡은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김연자는 인기에 힘입어 서울 올림픽 폐막식 엔딩 세리머니로 주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의 김연자는 엔카계의 거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어 일본의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에도 총 3번이나 출전했으며 (1989년 '아침의 나라에서', 1994년 '흐르는 강물처럼, 2001년 '임진강'이란 곡으로 출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엔카 가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2001년 4월에는 북한 김정일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평양에서 공연을 개최, 그 외에도 사할린, 상파울루 등 해외 각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며 일본에서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하여 김치를 판매하는 등 한국과 관련된 활동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일본 활동 당시 차별과 극우 세력에게 위협 ◁
김연자는 일본에서 열리는 콘서트나 TV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자주 한복을 입고 나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특히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일본 극우 혐한 세력에게 위협과 핍박을 받기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김연자는 “나는 상관없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니 당연하게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다. 그게 싫으면 내 콘서트에 안 오면 되는 것이다”라고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활동 당시 한국인이란 이유로 차별과 편견을 많이 받았지만 오로지 실력 하나로 모든 것을 이겨낸 가수라고 합니다.
아모르파티 ◁
2009년 국내 무대 ‘10분 내로’라는 곡으로 복귀해 좋은 성적을 냈지만 8년간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는데요. 그러나 이 곡으로 일본 콘서트에서도 한국어로 불러지면서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2013년 발표곡 EDM과 트로트를 결합시킨 ‘아모르파티’가 4년 만인 2017년 인터넷에서 재조명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전 세대를 아우르며 젊은 층들도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 파티는 알고 있을 정도로 큰 화제가 됩니다.
김연자는 '아모르 파티'라는 곡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한동안 뜸했던 국내 무대에서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김연자는 이곡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CF를 찍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 ‘아모르파티’의 인기로 한 달 기름값만 천만 원이 나올 만큼 바쁜 행사를 뛰고 있다고 합니다.
전남편 김호식 / 수입 ◁
김연자의 전 남편은 재일교포 김호식(오카 히로시)씨 였으며 지휘자 겸 앨범 프로듀서, 김연자의 매니저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77년 일본으로 처음 진출했을 때 방송에 출연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낯선 외국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들이 어렵고 힘들 때 전 남편 김호식이 김연자에게 다가와 한국말로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호식은 밴드 지휘자였다고 하는데요. 누군가와 한국말로 대화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웠다고 합니다.
어리고 힘들었던 김연자에게 김호식은 처음부터 호감이었으며 결국 김연자가 1980년 한국으로 귀국해서 가수 활동을 하고 1982년 4월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두 사이에는 자식이 없으며 아이에 신경 쓸 시간도 없고, 두 사람 다 아이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아이를 가지지 않은 이유는 남편의 강요 때문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김연자와 전남편 김호식은 18세 차이가 나며, 김연자의 어머니와 2살 차이 아버지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하는데요. 두 사람은 2012년 5월 이혼했으며 사유는 남편과의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호식의 직업은 일본에서 색소폰 연주가 겸 밴드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클리어톤즈 단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혼 후 김연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요.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 전적으로 남편을 믿고 의지했다고 합니다. 한창 바쁠 당시 자신의 개런티가 얼마인지 물어본 적도 없고 은행에 가본 적도 없이 오직 남편만 믿고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요.
"나는 내가 번 돈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루에 1억 원 이상 번적도 있다. 대략 100억 엔(한화 약 1400억원) 이상을 벌었다고 예상만 하고 있다“라고 고백하며 위자료 뿐 아니라 재산 분할 등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혼 후 김연자는 한국으로 빈털털이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재혼 / 홍익 기획 홍상기 대표 ◁
김연자는 자신의 소속사 대표와 열애 중이며 조만간 재혼을 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2012년 이혼 후 국내 복귀 과정에 난관에 부딪히며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는데요.
홍상기 대표가 김연자가 '아모르파티'로 재기할 수 있게 많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이어 자신을 많이 배려해 주고, 굉장히 믿음직스럽다고 하며 “싸우는 건 한 가지밖에 없다. 술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며 “남자친구는 술을 안마시는데 저는 약간 마신다”라고 밝혔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수의 꿈을 안고 홀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힘든 시기를 꿋꿋하게 이겨냈는데요. 실력과 성실함으로 무장한 그녀이기에 지금까지도 김연자의 인기가 식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온갖 차별을 받았지만 실력 하나로 일본에서 성공, 다시 한국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그녀의 열정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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