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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봉 주교님 신부님 나이 집 안동 천주교회 본문
두봉 주교님 신부님 나이 집 안동 천주교회
프랑스 오를레앙 출신인 두봉 주교는 1929년 9월 2일 92세, 본명은 르네 뒤퐁(René Dupont)이며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주교로 1969년부터 1990년까지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은퇴했습니다.
“갖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소중하다”는 자신의 말대로 2004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에 머물고 있으며 이곳은 성당이 없는 작은 동네로 자신의 집을 성당으로 자처, 손수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인근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두봉 주교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성당에 다니면서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하는데요. 이후 1950년 외국에 천주교를 전파하는 선교사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를 해 1953년 24살 때 사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제가 된 다음해인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전도사로 한국에 파견되어 화물선을 타고 두 달 반이나 걸려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의 첫 임지는 대전 대흥동성당, 그곳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면서 오기선 주임신부가 프랑스 성(姓) 뒤퐁의 음을 딴 '두봉'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였으며 ‘선교사로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라고 말하며 한국전쟁 당시 함께 군대 생활을 하던 친구가 목숨을 바친 나라이기에 더욱 뜻깊었다고 합니다.
이후 1969년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로 수품되며 초대 안동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하고 농민회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이어 상지전문대학(現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 등을 설립하였습니다.
특히 1979년 5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부는 눈엣가시 같았던 두봉 주교에 감시, 도청에 더해 추방 압력이 거세지게 됩니다.
‘오원춘 사건’은 경북 영양군 농민들이 농협에서 알선한 씨감자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면서 오원춘을 비롯한 농민들은 항의를 했고 그 결과 보상을 받게 됩니다.
이후 오원춘은 농민들을 상대로 이 과정을 강의하러 다녔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중앙정보부가 그를 강제 연행, 모진 고문을 당한 뒤 20일 뒤 풀려난 오원춘은 이 사실을 카톨릭에게 알렸고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각종의 기도회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의성 집회가 일어나게 됩니다.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이에 당시 독재정권이었던 정부는 정호경 신부를 구속하고 안동교구장인 두봉 주교에겐 추방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추방 결정에 두봉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주교회의 의장과 함께 로마로 갔으며 당시 교황에게(요한 바오로 2세)인권보호 등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이라고 설명, 교황대사가 항의해 추방은 보류됩니다.
이후 귀국한 한 달 뒤에 10.26(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서거)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농민 사목과 지역사회 발전에 힘써 온 두봉 주교는 198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나폴레옹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2012년 제16회 만해실천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대통령표창인 올해의 이민자상과 백남인권봉사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어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는 두봉 주교는 201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며 복수국적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이 긴 두봉 주교에게 부모님은 매주 한 통씩 30년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외국인 최초로 주교라는 높은 자리에 오른 두봉 주교는 퇴임 때까지 22년간을 안동교구장으로 역임하면서 항상 절대약자의 편에서 소외받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하여 땀 흘리고 아픔을 함께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