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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 나이 결혼 남편 이혼 오빠 여러분 아버지 본문
윤복희 나이 결혼 남편 이혼 오빠 여러분 아버지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인 윤복희는 본명 윤복기, 충청남도 보령시 출생, 1946년 3월 9일 생으로 75세입니다. 윤복희는 2남 2녀 중 막내로 큰 오빠 윤영기, 작은 오빠는 우리나라 최고의 록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키보이스’의 멤버이며 1959년 ‘정든 배’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목사인 윤항기 씨입니다.
이어 윤항기 씨는 자신의 동생인 윤복희의 대표곡인 '여러분'을 작곡했으며 이 곡으로 윤복희는 1979년 MBC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 윤항기 씨는 이후로도 싱어송라이터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윤복희는 6살이던 1952년 뮤지컬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해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였고, 1963년 세계적인 아티스트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공연을 다니며 해외 활동을 시작, 1964년 ‘코리아 키튼즈’를 결성해 필리핀과 홍콩, 싱가포르를 거쳐 영국, 독일(서독), 스페인, 스웨덴, 미국으로 차례차례 건너가 1964년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에서 1976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그녀는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하는 등 활발한 해외 활동을 이어갔으며 1967년 일주일의 휴가로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나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당시 젊은 여성들에게 대유행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부에서 치마 길이를 단속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남다른 가창력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며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윤복희의 아버지는 윤부길 씨로 경성음악대를 졸업하고 일본 음악학교에서 클래식을 전공, 코미디언이면서 연극, 뮤지컬, 오페라를 제작했으며, ‘부길부길 쇼단’을 만들어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당대의 천재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어 그녀의 어머니 성경자 씨는 전설적인 춤꾼 최승희의 제자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고전무용가이며 배우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스스로 “부모 사랑은 전혀 못 받았어요.” 라며 무대 위의 음악과 춤을 보며 자랐고 2살 때부터 아버지의 제자들의 손에 자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5살 때부터 무대에 오르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그녀의 아버지 윤부길 씨가 마약 중독자 수용소를 드나들기 시작, 어머니가 수용소 비용을 대기 위해 전국 공연에 따라나섰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하며 당시 윤복희의 나이 7살 때였다고 하는군요.
이어 그녀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는 내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았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털어놓았는데요. 아버지는 윤부길 씨는 그녀가 10살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즐거웠던 무대는 자신과 형제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대가 되었고 어린 나이지만 더 악착같이 일하고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미8군의 유명 쇼 단에 들어갔고 열네 살의 나이로 집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1963년, 세계적인 아티스트 루이 암스트롱이 내한해 열여섯 살 소녀 윤복희에게 함께 무대에 설 것을 제안하게 됩니다.
이후 윤복희는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공연을 이끌었으며 해외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 큰 화제를 모으며 1976년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윤복희는 1967년 전남편 유주용 씨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두 사람은 윤복희가 14살 미8군 무대에 설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이로 그녀에게 오빠이자, 연인이자, 아빠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유주용 씨는 아버지는 독일 유학파 출신 의학 박사, 어머니는 독일 여성으로 독일계 한국인으로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화학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수재이자 5개 국어에 능통한 유능한 사람이었으며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신혼집을 차리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그녀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 행복이 너무 좋아서, 그만 무대에서 내려와 살림만 하는 주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저는 평범한 삶을 원했어요. 무대도 지겨웠고.”라고 털어놓았는데요.
하지만 그녀의 남편 유주용 씨는 재능이 뛰어난 아내를 높이 사 가수를 그만두고 로드매니저를 자처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결혼 전보다 더 많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어 전남편 유주용 씨는 아내 윤복희의 스캔들에 예민하게 반응 계속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마침 가수 남진이 윤복희를 사랑한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보도됐고 홧김에 “나도 좋아한다”고 응수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1976년 한국에 잠시 들어온 사이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남진은 약혼을 하자며 다이아 반지를 가져왔고 유부녀인 채로 약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후 윤복희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남편과 다툰 후 홧김에 결혼했다. 순진한 남자의 마음을 이용 했다” 라며 당시 남진에게 ”‘미안하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한 후 결혼반지를 돌려주고 집도 다 가지라고 했다.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집에서 나왔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윤복희와 남진은 3년 만에 이혼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6개 월만에 헤어졌다고 하며 전 남편 유주용 씨와는 1985년에 이혼, 윤복희는 “저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 준 사람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어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윤복희는 ‘여러분’이라는 명곡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꾸준하게 자신의 콘서트와 뮤지컬 무대에 오르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