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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랑
한지일 나이 근황 가족 부인 아들 배우 프로필 영화제작 본문
한지일 나이 근황 가족 부인 아들 배우 프로필 영화제작
배우 한지일은 본명 한정환이며 황해도 연안군 출생, 1947년 12월 17일 76세이며 학력은 인창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신문방송학 / 학사), 1970년 광고 모델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성인 영화 제작자로 변신하여 100억 원 재산으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IMF 때문에 전재산을 잃고 이혼해 안타까운 생활을 겪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지일의 본명은 한정환으로 김지미’의 ‘지’와 ‘신성일’의 ‘일’을 따서 한지일이라는 예명을 만든 것이라고 하며 1970년 모델로 데뷔한 이후 '아다다''아제아제바라아제' 등 60여편의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리며 대종상 신인상과 조연상, 아시아 영화제 주연상 등을 휩쓸었습니다.
이후 성인 영화를 제작하며 제작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데요. 물론 성인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는 가족 영화를 찍었으나 성적이 나오지 않아 더 이상 손해를 볼 수 없어 성인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찍으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한 두 작품만 찍어도 5,6 억씩 돈이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젖소부인‘ 시리즈를 비롯하여 에로영화 300편을 제작하며 “한 달에 세, 네 편씩 찍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정이 컷다”고 밝혔습니다.
한지일은 1990년대에 비디오영화 전문 회사 한시네타운을 세워 성인 영화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시작으로 300여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대해 한지일은 “300편을 제작했는데 180편이 히트했다. 한 작품당 5만 장을 푼다. 그때 비디오 1개당 2만 2천 원이라 한 작품이 7억~8억이었다”고 밝혀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한지일의 세운 한시네마타운은 당시 한국 비디오 업계의 1위로 였고 이 영화사를 통해 배출한 스타로는 젖소부인 시리즈로 유명한 진도희를 비롯해 국내 비디오계를 주름잡았던 많은 스타들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한지일이 직접 발굴한 진도희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그녀는 한국와 일본 홍콩을 오가면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100억대의 자산가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이혼과 과잉투자와 IMF로 사업마자 실패한 후 전 재산을 잃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한지일은 "과잉 투자를 했다. IMF 위기 터지기 전부터 건물을 샀다. 평택 호텔도 사고, 대전에 5층 짜리 건물도 샀다. 그 당시 영화사였던 주택이 하나 있었고, 거주하던 주택도 있었다. IMF 터지니까 융자받은 것들이 문제가 생겼다"고 털어놨습니다.
한지일은 지난 방송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방화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는데요. 부인 명의로 영화사를 설립한 그는 외환 위기로 사업이 타격을 입으면서 영화사 경영권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방시 부인과 별거중이었던 한지일은 “(외환위기 이후) 아내와 (별거하면서) 만남이 없다가 이제 만나려고 (아내의) 영화사에 찾아갔다. 저는 그 당시만 해도 양양에 있는 주유소에서 배달하고 있었다”며 “(아내) 회사에 갔는데 영화 스태프들이 있더라. 스태프들이 시나리오 보고, 배우들이 와서 계약하는 모습 등을 목격하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어 “화가 나서 옆에 있던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를 사다가 (불을 질렀다)”고 고백하며 “크게 불이 나지는 않았다. 사람이 다칠 정도로 불이 난 건 아니었다”며 “그 당시에 홧김에 이성을 잃고…그래서 감옥에 가서 몇 달 살기도 했다”고 털어놨습니다.
한지일은 전 부인과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으나 IMF가 터진 뒤 6개월 후 아내와 이혼했고 두 아들은 전부인과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지일은 과거 방송을 통해 아들을 공개하기도 했는데요. "서로 바쁘다보니 연락은 뜸하게 했는데 자주하는 편은 아니었다"며 "초등학교 4학년 때 둘째아들을 미국에 보내 3년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보면서 생활했다. 아버지로서 해준 게 하나도 없어서 아쉽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어 아들 역시 "형도 한국에서 과로로 쓰러졌다고 하더라.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지만 여건상 그럴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파산한 후 미국으로 넘간 한지일은 "베트남, 미국을 15년이나 떠돌아다녔다. 주위에서 배우를 해보라고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라며 "나무 베는 일, 블라인드 청소, 화장품 회사, 마트 직원 등 안해본 일이 없다. 직업을 27개나 가졌었다"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두 달 남짓한 기간에 120개 업체를 뚫어 최우수 영업사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지일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를 계기로 한국에 돌아와서 정착했으며 시니어 모델로 활동, 365생명사랑' 자살방지 홍보대사를 비롯, 사단법인 실종아동찾기협회, 한국재능기부협회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