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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가수 나이 근황 연하 남친 남편 이봉조 아들 본문
현미 가수 나이 근황 연하 남친 남편 이봉조 아들
가수 현미는 본명 김명선,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출생, 1938년 1월 28일생 84이며 학력은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과 / 명예학사),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로 데뷔했습니다.
가수 현미는 작곡가 이봉조와의 사실혼 관계로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둘째 며느리는 1980년대 후반 ‘사랑은 유리같은 것'을 부른 인기 가수였던 원준희이며 가수 노사연과 배우 한상진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현미의 첫째 아들 이영곤은 2008년 46살에 고니라는 예명으로 첫 싱글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여대생이었던 메리트를 살려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 이후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 작곡가 이봉조가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을 만들어주면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8군에서 공연하던 현미의 무대를 보고 밴드 세션의 마스터였던 이봉조가 노래 ‘밤안개’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후 1962년 이봉조와 다시 작업을 하면서 현미가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60년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정도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이어 1965년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 엄앵랑 주연의 영화 '떠날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불러서 연달아 히트작을 만들어냈으며 1968년 이봉조 작곡집 ‘바람’으로 또다시 히트작을 내놓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몽땅 내 사랑'과 '두사람', '애인', '무작정 좋았어요'등 까지 연이은 히트와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하 60년대 후반까지 스타 반열의 자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가수 현미는 주로 작곡가 이봉조가 만든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두 사람은 여러 음악 작업을 하며 연인 사이로 발전해 2명의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봉조가 딸 2명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며 이후 이혼했다는 거짓말로 두 집 살림을 가져오던 사실이 밝혀지며 둘의 관계는 파경을 맞게 됩니다.
가수 현미는 이봉조와의 만남에 대해 “내가 스무 살, 남편이 스물다섯 살 때 처음 만나 연애했다”라며 “23살에 임신을 했다. 결혼식 날짜까지 잡았는데 남편이 계속 결혼을 연기하더라.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여자가 날 찾아왔다. 자신이 이봉조의 부인이라고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현미는 “당시 나는 임신 8개월이라 유산도 못했다. 남편이 이혼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두 집 살림을 했다는 걸 뒤늦게 알고 괴로웠다”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다보니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이후 이봉조는 아내와의 이혼 서류를 내밀며 다시 한번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 했다고 하는데요. 그 말은 믿은 현미는 이봉조와 살림을 차렸으나 지속적으로 두 집 살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미는 "그냥 이혼했다고 해서 이혼한 줄 알았다. 알고 봤더니 그거 다 날 놓치기 싫어서 자기가 가짜로 이혼서류까지 만들어서 갖고 왔던 것이었다. 난 몰랐다“라고 말하며 ”당신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이별을 통보한 뒤 아이들과 집을 나왔다고 합니다.
이후 몇 년간 왕래가 없었다고 하며 이봉조의 건강 악화로 꼭 한 번만 찾아가 봐달라는 시누이의 연락을 받고 이봉조를 찾아가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봉조는 본부인에게 돌아가지 않은 채 13년간 홀로 지냈으며 결국 두 사람은 재결합을 약속했으나 재결합 직전에 돌연사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현미는 “13년 동안 혼자 홀아비로 살다 돌아가시니까 그게 가슴이 아프고 가엽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는데요. 작곡가 이봉조는 훌륭한 색소폰 연주자이자 '천재' 작곡가, 영화음악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으며 1987년 여름 향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 생전에 본처와의 합장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며 본처 자식들의 요구와 현미측의 배려로 합장했다고 합니다.
가수 현미는 1962년 아들을 출산한 후 ‘밤안개’로 가요계에 데뷔해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매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성량이 매우 큰 현미는 녹음할 당시 다른 가수들과 달리 몇 발자국 떨어져서 녹음했을 정도였다고 하며 당시에 보기 드문 재즈 창법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연이은 히트곡들을 내놓으며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무대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성공가도를 달렸으며 예능 출연을 통해 다양한 곳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현미는 띠동갑 12살 연하와 연애 중임을 밝히며 많은 축하를 바기도 했는데요. 지난 2021년 방송에 출연하여 "데이트는 계속해야 한다. 벌써 혼자된 지가 꽤 됐는데 데이트를 하니까 에너지도 생긴다. 벌써 8년이 됐다"고 설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