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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남 나이 하청일 근황 아내 가족 고향 딸 본문
서수남 나이 하청일 근황 아내 가족 고향 딸
서수남은 경기도 경성부 창신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출생, 1943년 2월 25일생 79세이며 키 187cm, 학력은 발산초등학교# (졸업), 이리동중학교 (졸업), 서울공업고등학교 (화학과 / 졸업), 한양대학교 (화학 / 학사), 1964년 ‘아리랑 브라더스’로 데뷔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결혼해 슬하에 3녀를 두었으나 전 아내가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10억 원이 넘는 빚을 떠안게 되면서 2003년 이혼했으며 2013년에는 미국에서 큰딸을 교통사고로 잃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서수남과 하청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수남은 노래뿐 아니라 남다른 입담으로 코미디 프로, 드라마, 예능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이후 ‘서수남의 노래교실’을 시작하며 제2의 전성기를 이어가게 된 서수남은 당시에 대해 "'서수남 하청일' 활동 후 인기가 떨어지고 수입이 줄어들어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서수남의 노래교실'을 시작했다“라며 ”걱정과 달리 노래교실 강좌만 개설하면 주부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돈도 과분하게 많이 벌게 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사기 사건에 연루되면서 큰 시련을 겪게 되며 오랜 시간 꾸려오던 노래교실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서수남은 “1999년 11월경 20억 사기 사건에 연루되면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아무도 모르게 투자를 잘못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라며 보증을 선 부분도 있어 빚쟁이들에게 무척이나 시달렸습니다“라고 털어놨습니다.
당시 서수남의 아내는 10억 원이 넘는 빚은 남기고 가출하며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고 하는데요. 채권자들이 서수남의 노래교실까지 찾아오며 더 이상 노래교실을 유지할 수 없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대인 기피증까지 걸린 세 명의 딸들을 위해서라도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서수남은 “재산 중에 가장 먼저 날아간 건 현금이었고, 그다음 집이었다. 셋방 얻을 돈이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라며 “제게 딸 셋이 결혼할 나이에 그런 시련을 당했다. 내가 고생하는 건 괜찮지만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아빠가 비참하게 되리라곤 생각 못 했을 거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60살을 바라보는 나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희망이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들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후 2015년 미국에 있는 교통사고로 큰 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당시 "병원 응급실에서 '위출혈이 돼서 위독하니까 빨리 와 달라'고 하더라. 비행기 예약을 하고 가려는데 딸이 사망했다는 전화가 왔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어 “그때 제가 ‘병원의 규칙대로 시신을 화장해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했는데, 유골이 화물 비행기로 오더라. 그걸 잊어버리지 않는다. 유골을 제가 안고 오는데, 부모가 살아서 그런 경험을 정말 하면 안 된다. 정말 가슴 아프고, 내가 죄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서수남과 하청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수남은 1962년 MBC 주최 서울특별시 콩쿠르대회에서 금상을 수상, 한양대 재학 시절인 1964년 DBS 동아방송 주최 대학중창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중앙대에 재학 중이었던 하청일을 만난 후 천장필·석우장 등과 함께 남성 4인조 컨트리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를 결성해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서수남과 하청일 듀엣이 되어 1969년 MBC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에서 하청일과 함께 "서수남, 하청일" 콤비로 데뷔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후 1971년 ‘팔도유람’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며 국민가요인 1975년 ‘과수원 길’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 이외에도 ‘수다쟁이’, ‘동물농장’, ‘오! 멋진 세상’, ‘즐거운 여름’, ‘한번 만나줘요’, ‘우리 애인 미스 얌체’ 등 많은 곡들로 사랑받았습니다.
서수남과 하청일은 팀 결성 후 27만에 해체를 하며 당시 잠적, 불화설 등 루머가 많았는데요. 두 사람의 해체 이유는 하청일은 시작한 사업이 잘 되면서 1997년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어 대학생 때 만나 팀을 이뤄 현재까지도 다툰적이 없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라고 하며 현재까지도 연락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서수남은 아내가 수억 원의 빚은 남겼던 사건으로 을 갚기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 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받은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었다고 합니다.
결국 당뇨병 진단과 함께 고지혈증에 디스크까지 생기며 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서 건강관리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다양한 취미와 꾸준한 운동으로 현재 80대임에도 60대보다 훨씬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