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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테너 성악가 나이 아내 부인 교수 향수 학력

달소다 2022. 6. 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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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테너 성악가 나이 아내 부인 교수 향수 학력

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로 유명한 성악가 박인수는 1983년 서울 출생, 경동고, 서울대 음악대학 졸업, 뉴욕 줄리아드 음대, 맨해튼음악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1983년부터 서울음대 교수로 재임, 2003년 퇴임했습니다.

 

성악가 박인수는 국내외 독창회 2000회 이상, 오페라에만 300회 이상 주역으로 출연했으며 서울음대 교수 퇴임 후 현재는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1989년 클래식과 가곡을 접목한 국민가요 '향수를 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르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당시 70만 장의 앨범이 팔리는 등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클래식계에서 '클래식 음악을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자신이 단장으로 내정되기까지 한 국립 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하기까지 하는데요.

 

 

당시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크로스오버는 상당히 생소했고, 이 때문에 클래식계에서 반발이 심하였다고 합니다.

 

이어 함께 부른 가수 이동원과는 친분도 있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1989년 어느 날 가수 이동원이 찾아와 시를 보여주며 함께 노래를 하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국민가요 '향수'는 시인 정지용이 쓴 동명의 시에 가사를 붙이고 김희갑이 작곡한 곡)

 

가수 이동원은 지병인 식도암으로  2021년 11월 14일 별세했습니다.(향년 70세)

이에 성악가 박인수는 클래식 성악가가 대중가수랑 음반을 내니까, 좀 시끄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고, 파문이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냥 시가 좋고, 또 시에 붙여진 곡이 좋으니까,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해 녹음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불이익과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제가 향수를 부르지 않았다면 대중에게 성악가가 이처럼 잘 알려질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박인수 성악가는 서울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3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요. 그의 아버지는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서 유학을 했고, 서울시청에서 운수과장, 도시계획과장, 건설과장 등 요직을 거쳤으나, 너무나 청렴하여 자식들 학비조차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초등학교 때는 서울 세검정 일대에서 자두, 배 등 과일을 좌판에서 팔았고, 중학교 때는 경기도 수원에서 조선일보 신문배달을 하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물건을 얻어 팔았다고 합니다.

 

특히 중학교 때는 럭비, 기계체조, 유도, 수영 등을 배우다 싸움 꽤나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며 성가대를 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 말 교회 목사로부터 성악을 하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고등학교 졸업 후 구청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성악가의 꿈을 꾸게 되었고 사정이 넉넉지 않았기에 이우근 당시 이화예고(현 서울예고) 선생을 찾아가 부탁, 3달 동안 무료로 성악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재능이 있었던 그는 서울대 음악대학 성악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으나 학교를 열심히 나가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군대를 제대한 후 휴학을 했다가 노래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며 1967년 국립오페라단에서 '마탄의 사수'의 주인공 막스역을 맡아 학생 신분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 혹평이 쏟아졌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10년 만인 1968년 가을에 대학을 졸업,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오페라에 도전, 1969, 서울오페라단이 만든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게 됩니다.

 

이때의 공연 테이프를 들은 미국 버펄로음악대학의 한 교수가 미국으로 올 것을 제안, 일회성 공연이었지만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다행이 성공적인 공연으로 학교 측으로부터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받고 미국에 남게 되었으며 이듬해 명문대인 뉴욕 줄리아드 음대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후 맨해튼 음대 석사과정 학생으로서 라보엠, 리골레토, 토스카, 돈파스콸레 등 대다수 오페라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박인수 성악가는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역, 캐나다, 남미지방에까지 공연을 다닐 정도로 주역 테너로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후 1983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03년 퇴임할 때까지 3백 회가 넘는 오페라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성악가 박인수는 아내 안희복 교수와 1965년 결혼식을 올렸으며 남편 박인수 교수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식당 웨이트리스, 계산원, 베이비 시터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생활을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박인수 성악가의 아내 안희복 씨 역시 소프라노 성악가로 한세대 명예교수이며 외아들 상준씨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프리랜서 플루트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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